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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Life

42서울은 피어러닝(동료학습)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yechoi 2020. 7. 1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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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꼴 42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신 교육 모델'이다. 42가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 학교'를 성공적으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강의하는 교수나 선생이 없는 대신 학생들이 과제를 진행하며 서로에게 배우며 성장한다. '동료학습(피어러닝 Peer Learning)'은 42의 가장 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에꼴 42 한국 캠퍼스인 42 서울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했다. 에꼴 42의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온다고 했다. 당시 개발 쪽에 관심이 커지던 나는 공부할 공간으로 42 서울을 택했다. 여러 고려사항이 있었지만 혁신적인 교육모델을 외부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닌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게 한 가지 이유였다. 

첫 교육생 모집에 지원한 뒤 한달간의 입학시험인 피씬(la piscine 수영장이라는 뜻으로 알아서 헤엄쳐 살아남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을 거쳐, 지금은 1기 본교육 과정생으로서 공부하고 있다. 지난 시간 동안 '동료학습이 단지 이상적인 구호는 아니었을까' 또는 '정말로 효과적일까'와 같은 궁금증이 어느정도 풀렸다. 42를 직접 경험해본 입장에서 어떻게 42 서울이 동료학습을 구현했는지 그려보고자 한다. 

 

클러스터(교육장) 모습. 총 세 개 층에 걸쳐 아이맥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도움 받지 않는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육받는 첫날을 생각하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관계자들이 '오리엔테이션' 하는 자리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풍경은 42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피씬 첫날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안내는 없다. 교육생들은 수많은 아이맥 사이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무엇을 할지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 날뿐이 아니다. 한달 내내 학생들은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례로 한달 동안 총 네번의 시험을 치르는데, 학교는 이에 대한 공지를 전혀 하지 않는다. 시험을 보기 위해선 일련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몰라서 첫 시험을 못치르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과제도 마찬가지다. 해결해야 할 과제만 주어지지, 참고할 수 있는 강의나 개념 설명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건 해답을 아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눈치 빠른 누군가는 시험 보는 방법을 알고 있고, 비슷한 과제를 다른 어느 곳에서 해본 누군가는 과제에 필요한 핵심 개념과 풀이법을 알고 있다. 내가 모른다면 주변에게 '너 이거 알아?' 물으며 다닐 수 밖에. 

나는 피씬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거의 처음 접했다. 아는 건 별로 없는데 해야할 과제는 많고 난도는 또 어려웠다. 같이 주로 공부하던 친구들도 비슷한 실력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서로가 얻어온 정보를 바삐 공유했다. '이 문제에선 이런 오류가 있대', '이거 해결하려면 이 개념 써야한대' 식의 대화를 끊임없이 나눴다. 

남들한테 물어 배운 건 책을 보며 익히는 것보다 빨랐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의 진도는 제법 빠르게 나갔다. 피씬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인생 처음으로 접한 친구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C의 기초적인 문법을 한 주 만에 뗐지만, '이 부분을 제대로 아는 게 아닌 것 같다'며 책을 붙잡고 있던 누군가는 어느 순간 보니 뒤쳐져 있었다.  

 

동료학습의 기폭제 '동료평가'

선생님이나 학습 자료가 없다는 절박한 상황은 동료학습을 하게 하는 요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동료학습에 가장 중요한 건 제도다. 42는 '평가'를 통해 동료학습을 이끌어내고 있다. 42에선 과제를 제출하고 싶다면 '동료평가'를 받아야 한다. 두 명 이상의 동료로부터 내 과제를 평가 받아야, 컴퓨터가 채점한 최종 점수를 받아볼 수 있다.

평가방식은 이렇다. 과제를 제출한 뒤 평가받고 싶은 시간을 선택하면, 해당 시간에 평가를 할 수 있는 동료 중에서 평가자가 무작위로 매칭된다. 평가자는 과제 제출자의 자리로 가 '면대면'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메일로 프로젝트를 받아서 보거나, 전화로 평가를 진행하는 비대면 방식은 모두 금지다. (다만 현재 본교육 과정에선 코로나라는 변수 때문에 비대면 평가가 가능하다.)

대면 평가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이 평가자로 온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과제 풀이법을 알어가거나 제출한 과제에서 부족한 부분을 짚을 수 있다. 바로 옆에 앉아있으니 과제를 진행하며 궁금하거나 애매한 사항도 물어볼 수 있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알고 있는 친구는 좋은 선생님이 돼줬다.  

동료학습 풀이 넓어진다는 것도 동료평가의 장점이다. 동료평가가 없었다면 친한 몇몇의 사람에게만 도움을 구했겠지만, 평가를 계기로 수많은 새로운 친구들과 얼굴을 터놓을 수 있다. 모르는 점을 친절하게 알려준 평가자가 있었다면, 평가가 아니더라도 다음에 또 찾아가 물어봤다. 고마운 일이 많으니 사물함엔 이들에게 나눠줄 초콜릿을 준비해뒀다. 

동료학습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나보다 진도가 느린 사람'이 평가자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평가 자체는 큰 무리가 없다. 시스템에서 제시하는 평가표에서 '제출자의 프로그램에 아주 큰 값을 넣어보라' 등으로 구체적으로 평가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고, 한명이 평가를 잘 해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또다른 동료평가와 절대적인 답을 내려주는 컴퓨터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못하는 사람이 평가를 하는 상황'은 집단 전체가 성장하는 매커니즘으로 작용한다. 만약 3단계의 과제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 5단계의 과제를 평가하러 갔다면, 그 사람은 미리 5단계에서 필요한 개념을 학습하고 올 수 있다. 동료평가는 진도가 빠른 상위권 '선구자들'의 지식이 집단 전체로 퍼지는 '낙수효과'를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피씬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돼 있다고 느껴졌다. 평가를 다녀보면 전공자 중에서도 뛰어난 소수가 아니고서는 전공자나 비전공자 대다수가 비슷한 레벨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다들 이 정도의 과제를 하고 있다면 제비뽑기를 해서 뽑아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동료평가가 동료학습의 기폭제로 작용하려면 선행 조건이 있다. 학습자들이 동료평가의 의의에 충분히 공감해야 한다. 피씬에서 대다수는 자신이 아는 무언가를 남에게 나누는 일을 기쁘게 여겼지만, 일부는 동료평가를 성가신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컴퓨터의 평가를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절차'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평가시간을 아끼기 위해 같은 시간에 두 개의 동료평가를 잡는 게 대표적인 케이스다. 진도가 빠른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을 썼다. 평가자들이 자신의 과제를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 두 번 반복하지 않고 한번에 빠르게 설명하겠다는 의도다. 이렇게 되면 평가자들은 자신이 채점해야 할 과제를 충분히 알 수 없고, 자신 말고 또다른 평가자도 있는 상황이라 궁금한 게 있더라도 충분히 물어보기 어렵다.

 

'친구에게 배우는 법'을 배운다

그 밖에 학습환경 동료학습을 자극하도록 갖춰져 있다. 주최측은 피씬 전에 진행하는 '창의캠프'를 주입식 사고 방식을 깨뜨리고 창의적으로 협업하는 시간이라고 소개했는데, 참여자 입장에선 피씬에서 만날 사람들과 미리 친해진 게 가장 도움이 됐다. 피씬에 와서야 사람들이랑 친해졌으면,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기까지 시간이 좀더 걸렸을 것 같다.

컴퓨터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환경도 동료학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모르는게 있으면 의자만 한바퀴 돌리면 오른쪽, 왼쪽, 오른쪽 뒤, 왼쪽 뒤 총 네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해야하는 요즘은 간격을 멀찍히 떨어져 앉지만. 

한 달간의 피씬 과정은 '친구한테 배우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동료학습에 임하는 태도는 본과정에서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찾아가서 물어보는 게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배웠으니 내가 물어봤을 때 상대방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답해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앞으로도 동료학습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42를 찾아와, 동료학습이라는 철학이 계속 지켜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동료학습은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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